들어가며
전 전자책이 좋습니다. 예전부터 학교에서 교과서를 보거나 필기를 할 때는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죠. 전공 서적, PPT, 참고 자료, 각종 노트, 기타 자격증 도서 등 원래라면 등산 배낭 + 단대 사물함 + 동아리방까지 점령할 어마무시한 자료가 패드 한켠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얌전히 NAS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전율을 느꼈습니다.[1]
예전 일본의 한 독서가가 남긴 말을 기사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다독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다름 아닌 돈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마차 5대 분량의 도서를[2] 보관할 공간을, 땅값이 성층권을 돌파하는 도쿄에서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전자책이 좋기만 한 걸까?
단연코 아닙니다.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컴퓨터에서 일정을 관리하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메모 앱에 필기하는 것보다, 주머니에서 간이 노트를 꺼내 필기하는 게 편하신 분들 많을 거예요.
전자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진입 장벽이 존재하죠. 저도 주변에 전자책의 편리함을 주장하며 많이 권하는데 실제로 정착하시는 분은 반절도 안 됩니다. 나아가 현재 기술로써는 전자책이 죽었다 깨어나도 대처할 수 없는, 종이책만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수십 년간 애서가의 서재에 보관된 양장본이 풍기는 은은한 매력, 갓 찍어낸 책의 속지에서 느껴지는 산뜻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각사각 감겨오는 손맛. 이 모든 것은 전자책이 흉내 낼 수 없죠.[3]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성향입니다. 전자책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효용이 종이책을 포기함으로써 감내하는 불편함보다 크다면 전자책을 선택하셔도 후회는 없을 거예요. 전 바로 그랬기에, 전자책에 매우 만족하고 있답니다.
Craig Mod 의 글
Craig Mod라는 사람이 aeon.co에 올린 글입니다. 이 분은 지난 수년 간 전자책을 읽어왔으나 이제 다시 종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저와는 정반대죠. 흥미로워서 글 일부를 발췌해 봅니다.
책의 외관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독자에겐 책의 내용도 중요하나 그 내용을 포장하는 겉모습도 허투루 볼 수 없다. 올바른 형식, 크기, 종이 재질, 여백, 잉크 등.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독자와 글의 유대 관계 관계는 더 끈끈해진다.
역시 책의 외견 높게 평가하고 있죠. 위에서도 적었지만 개인의 취향이긴 한데 전 책의 전통적 미적 가치보다 편리함을 더 중시합니다. 단, 이런 저라도 최대한 예쁘게 디지털로 재단된 전자책을 원하므로 예쁜 앞표지, 서체, 여백, 책장 넘기기 효과 등은 꼭 봅니다. 특히 이 책장 넘기기 효과는 “애걔. 그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하시는데 개인적으로는 있는 것과 없는 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넘기기 효과가 없는 뷰어에서는 책 읽는 맛이 나지 않거든요.
전자책의 문제점은 창의적인 책 디자인을 하지 못하게 하고 뷰어가 정해준 틀 속에서만 책을 찍어내게 만든다는 점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의 뷰어와 뛰어난 실력의 UX[4] 디자이너가 필요하죠. 뷰어라고 내놓은 앱이 고작 윈도우의 텍스트 프로그램 정도의 수준이라면 아무리 전자책이 편리해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존 책방에서는 클릭 몇 번만으로 책을 살 수 있다. 이러한 ’구매의 가벼움’은 종종 읽지 않고 보관만 하는 도서의 수를 늘린다.
단점이지만 장점도 되지 않을까요? 원래라면 보고 싶은 책을 사려고 시내의 교보문고까지 차를 타고 가서 주차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 3층 도서 코너의 구석에서 책을 집어 올린 뒤, 1층의 계산대까지 와서 결재하고 다시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클릭 몇 번에 해결할 수 있죠.[5]
마치며
전자책이 편리하나 자신의 독서 습관에 맞지 않는다면 굳이 넘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끝없이 쌓여가는 종이책에 지치셨다면 한 번 쯤은 일탈을 시도해 보셔도 좋습니다. 정착하실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적당한 리더기 하나만 있으면 방대한 서고를 통째로 손에 쥘 수 있으니까요.
